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어떻게 하면 기억을 잘 할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어젯바에 졸음을 참아가며 공부한 것이 시험장에서 하나도 빠지지 않고 기억되었으면 좋겠고, 언젠가 한 번 만나서 통성명했던 사람을 어디에선가 다시 볼 때 그 사람 이름 뿐만 아니라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까지 생생하게 떠오르면 사회 생활할 때 편하겠다는 생각을 적어도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기억을 더 잘할 수 있을지, 왜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이 감퇴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기억하는지를 안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찾을 것이다. 이 기억 과정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며 자신들 만의 답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1. 기억의 일반적 특징
머릿글에서 든 예처럼 기억을 못하는 일을 종종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기억이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일보다 고등학교 때 일을 더 잘 회상하는 것을 보면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빙하우스 (Ebbinghaus, 1885)가 망각곡선을 발표한 이후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억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정확할 거라고는 기대한다. 정말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일단 우리가 회상하는 것은 정확한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은 우리가 기억과정을 이해하면 알 수 있는데, 현재 기억과정에 관해 제기되는 설명들이 보여 주는 일반적인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보처리 관점에서 기억과정을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기억을 능동적인 처리 결과로 본다는 점이다.
정보처리(information processing) 관점은 우리가 어떤 내용을 기억하려면 질적으로다른 몇 단계를 거친다고 보는 입장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회상해 내려면 회상 할 내용이 우선 기억에 입력되어야 할 것이고, 그 정보는 기억에 남아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부호화(encoding), 파지(retention), 인출(retrieval)의 세 단계를 거쳐 기억을 회상하거나 재
인한다고 서술한다. 이와 같이 기억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하면, 여러 현상들의 원인을 특정 단계와 관련지을 수 있고, 나아가 기억 개선책을 구할 때 보다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방안을 찾아내기가 쉬워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건망증이라 부르는 중년 이후의 기억력 감퇴는 부호화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망증의 대응책은 파지나 인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아니라 부호화단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중점적으로 고려하면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보처리 관점에서는 기억을 지속시간에 따라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나눈다. 단기기억(short term memory)은 이름 그대로 지속시간이 짧은 기억이고, 장기기억(long term memory)은 지속시간이 긴 기억인데,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은 부호화, 파지, 인출 단계에서 특성이 다르다. 어떻게 특성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배우기로 하고, 여기서는 사람들의 기억이 불완전한 것은 단기기억에 있거나, 장기기억에 있는 내용 중 단기기억으로 불려져 온 내용만을 회상해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이런 것이 정보처리 관점에서 기억을 설명하는 예라는것만 언급하자.
기억의 두 번째 일반적인 특징으로, 기억은 주어진 내용을 녹음기처럼 수동적으로 담아 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능동적으로 처리한 결과가 저장되고 인출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확실하게 기억한다고 우기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만약 사람의 기억이 녹음기나 비디오에 녹음되거나 녹화된 것처럼 수동적인 것이라면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일어났던 것처럼 기억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던 것처럼 기억한다. 그리고 실제 일어났다고 우기는 일의 상당수는 상식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사건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도 자기의 입장이나 경험에 따라 아주 다르게 기억하기도 한다. 이는 사람들은 어떤 사건을 그 사건이 일어난 상황, 그 사건과 관련된 지식 등을 고려해서 이해한 것을 토대로 기억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시험공부할 때 하듯이 나름대로 비슷한 것들을 묶는 것과 같은 조직화를 해서 기억을 하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기억을 수동적인 복사물이아니라 능동적인 처리의 결과라고 본다.
2. 기억과정
많은 심리학자들이 기억을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 나누며 기억을 수동적인 복사물이 아니라 능동적인 처리의 결과라고 본다고 서술하였는데, 그럼 사람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기억하는 것인지 알아보자. 기억과정에 대한 고전적인 모형은 앳킨슨과 쉬프린(Atkinson & Shiffrin, 1968)의 다단계 모형을 창고하면 좋다. 이 모형에서는 감각저장, 단기기억, 그리고 장기기억의 세 가지 상태를 상정하여 기억과정을 설명하였다. 감각저장(sensory register)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감각기관에 주어진 그대로 저장해 두는
단계이다. 스필링 (Sperling, 1960)은 시각자극을 사용한 실험연구를 통해 감각저장의 존재를 처음으로 증명하였다. 그는 감각저장이 있다면 화면에 있는 자극 전부를 기억하게 할 때보다 화면에 있는 자극 중 일부만을 기억하게 할 때 상대적으로 회상률이 높아야 한다는 결과를 예상했는데, 자극이 제시된 후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이 결과를 관찰할 수 있었다. 즉, 시각 감각저장에는 단기기억보다는
많은 수의 정보가 있지만, 지속시간은 매우 짧아 1/4초에서 1초 정도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울러 감각저장에 있는 정보는 감각기관에 수용된 외부자극에 대해 아무런 처리가 가해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다른 심리학자들은 청각 감각저장은 지속시간이 길게 잡아 2초 정도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럼 감각저장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시각 감각저장의 용도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생
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청각 감각저장에 대해서는 말소리 지각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 강하다. 즉, 말은 모든 부분이 동시에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펼쳐져서 제공되기 때문에 무슨 단어인지 이해하려면 처리되지 않은 상태의 감각자극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청각 감각저장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저장의 용도도 그리 분명하지 않고, 감각저장 단계에서는 주어진 자극에 아무런 처리가 가해지지 않았으며, 지속시간도 매우 짧다 보니 최근에는 감각저장을 기억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참고로 심리학자 나이서(Neisser,1967)는 시각 감각저장을 영상기억(iconic memory), 청각 감각저장을 청상기억(echoic memory)이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우리에게는 아주 많은 자극이 계속해서 가해지기 때문에 감각기관에 수용된 모든 자극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 그중 일부에만 주의를 기울여 자극의 정체 등을 판단하게 된다. [그림 5-2]에서 선택적 주의라고 표기된 것이 바로 그 의미이다. 그리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주의가 기울여진 자극만이감각저장에서 단기기억으로 넘어가게 된다고 본다.
1) 단기기억
단기기억은 이름 그대로 수명이 짧은 기억을 말한다. 그런데도 단기기억이 심리학자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우리가 자각하는 내용은 단기기억에 있는 내용일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기기억에 있지 않은 내용을 인출하거나 자각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기기억에 있는 것을 우리가 다인출하거나 자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1) 부호화와 파지
앞 절의 끝 부분에서 서술했듯이 어떤 정보가 단기기억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그 정보에 주의가 기울여져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이런 단기기억은 어떤 특징을 가질까? 첫째, 앞에서 서술했듯이 단기기억은 수명이 짧다. 브라운(Brown, 1958), 피터슨과 피터슨(Peterson & Peterson, 1959)은 기억해야 할 철자를 세 개(예: T, K, Q) 들려주거나 보여 준 다음, 곧장 '256' 과 같은 숫자를 하나 불러 주고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해서 3을 빼 나가는 숫자빼기 과제를 시킴으로써기억해야 할 철자들을 되뇌지 못하게 하였다. 숫자 빼는 과제를 하는 시간을 달리해서 단기기억의 지속시간을 측정해 보았더니, [그림 5-3)에서 알 수 있듯이 삽입과제를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해내는 숫자가 급속하게 줄어드는 데 10초를 넘어서면 철자를 거의 기억해내지 못하였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여 단기기
억의 지속시간을 최대 30초 정도까지로 추정하였지만, 최근에는 단기기억의 지속시간을 훨씬 짧게 추정한다. 단기기억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용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숫자를 몇개 들려주고 나서, 들려준 숫자를 순서대로 회상하게 하면 단기기억의 용량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는 숫자는 대략 일곱 개 정도를 들려준 순서대로 회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일곱 개가 절대 개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낱자를 기억하게 하면 일곱 낱자 정도를 기억하지만, 단어를 기억하게 하면 일곱 단어 정도 기억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억할 때 어떤 단위로 부호화하느냐에 따라 절대 개수는 달라지지만, 처리 단위로 보면 비교적 일관되게 일곱 단위 정도로 그 용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조지 밀러의 유명한 구절 '마법의 수 7±2' 라는 것이다(Miller, 1956). 낱자보다 단어일 때 훨씬 더 많은 철자를 기억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이 보다 큰 단위로 부호화하는 것을 청킹(chunking)이라 하며, 청킹을 통해 우리는 단기기억의 용량 제한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2) 인출과 망각
그럼 단기기억에 있는 정보는 어떻게 인출될까? 스턴버그(Sternberg, 1966)의 기억탐사실험은 단기기억에 있는 정보는 한 번에 하나씩 순차적으로 처리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스턴버그는 참가자들에게 기억해야 할 숫자 들을 알려 준 다음 화면에 검사자극으로 숫자를 하나 보여 주고 그 숫자가 기억 해야 하는 숫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하였는데, 기억해야 하는 항목이 많아지
면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에 비례해서 길어지는 결과를 얻었다. 이 결과는 우리가 그 과정을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단기기억에서는 한 번에 하나씩 인출하는 계열처리가 일어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마지막으로 단기기억에 있는 정보의 망각에 대해서는 다른 정보에 의해 대체 된다고 보는 입장이 강하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단기기억은 일곱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로 볼 수 있는데, 가장 최근에 들어온 사람이 자리에 앉은 사람 중에 가장 힘이 약한 누군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단기기억에 있는 정보 중에 힘이 약한 정보는 활성화 정도가 가장 낮은 정보라고 할 수 있는데, 단기기억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거나 되뇌기가 되지 않았거나 다른 정보와 연결되지 않았던 정보가 활성화 정도가 약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3) 작업기억
최근에는 단기기억이라는 용어 대신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단기기억에서는 저장이라는 측면이 강조되는데 반해, 작업기억에서는 주어진 정보를 처리한다는 측면이 강조된다. 배들리(Baldeley, 1986)는 작업기억을 중앙집행기(central executive), 음운루프(phonological loop), 시공간잡기
장(visuospatial sketchpa)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나누는데, 이중 중앙집행기가 정보의 통합이나 주의 배분과 같은 처리를 주로 담당하는 요소다. 작업기억의 나머지 두 요소인 음운루프와 시공간잡기장은 각기 언어정보와 시공간정보를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저장소로 볼 수 있는데, 임시저장소를 둘로 나눈 것은 언어정보와 시공간정보가 독립적으로 처리되고 저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언어 과제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언어과제를 수행할 때에는 간섭이 일어나지만, 언어과제와 시공간과제를 동시에 할 경우에는 간섭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Baddeley, Grant, Wight, & Thompson, 1975). 또한 데인만과 카핀터(Daneman & Carpenter, 1980)는 작업기억의 용량이 글의 이해 정도와 상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 작업기억이 정보의 종합과 같은 처리와 관련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2) 장기기억
장기기억은 지속시간이 긴 기억으로, 현상적으로는 의식이나 자각과 관련이 적다. 또한 장기기억은 지속시간뿐만 아니라 부호화 단계나 인출 단계에서 단기기억과 다른 특성을 보인다.
(1) 부호화와 파지
이제까지 단기기억에 있는 정보가 되뇌기 등을 통해 장기기억으로 부호화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크레이크와 왓킨스
(Craik & Watkins, 1973)는 단순히 정보를 단기기억에 무르게 하기 위한 반복적인 암송과 같은 유지 되뇌기는 기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그 대신 다른 정보와 연결을 하는 정교화 되뇌기(elaboration rehearsal)가 기억에 도움이 된다. 또한 다른 정보들과 연결하지 않더라도 주어지는 정보를 의미적으로 처리하면 기억이 잘 된다. 하이드와 젠킨스(Hyde & Jenkins, 1969)는 대학생들
에게 단어를 하나씩 제시하면서 그 단어의 철자수가 몇 개인지, 단어에 특정 철자가 있는지, 그 단어가 유쾌한지 여부를 판단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단어목록에 있던 단어들을 회상하게 하였다. 그런데 단어들을 판단할 때 나중에 단어들을 회상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단어가 유쾌한지 판단했던 대학생들은 단어를 회상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었던 대학생들과 같은 정도로 단어들을 회상하였다. 또 바워 등(Bower, Clark, Lesgold, & Winzenz, 1969)은 기억해야 하는 정보들을 뜻이나 범주 등을 기준으로 조직화하는 것도 장기기억의 부호화를 향상시켜 기억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이 결과들을 요약하면 관련된 정보들과 연결지어 주는 정교화와 조직화가 장기기억의 부호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파지에서도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은 다른 특성을 보여 준다. 앞 절에서 단기기억은 지속시간이 짧고 용량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고 한데 반해, 장기기억은 지속 시간과 용량이 거의 제한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2) 인출과 인출실패
장기기억의 인출과 망각기제도 단기기억과는 매우 다르다. 단기기억에서는 정보가 순서적으로 인출되는 것 같다고 앞 절에서 서술했고, 그러다 보니 단기기억에서는 기억해야 할 항목이 많아지면 시간이 더 걸리는 특징을 보였다. 장기기억은 용량이 무한대라고 할 수 있는데 단기기억처럼 장기기억도 순서적으로 인출이 일어난다면, 장기기억에 있는 내용을 인출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려야 한다. 그러나 장기기억에 있는 정보들은 일반적으로는 아주 빨리 인출된다.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은 단어의 발음, 뜻을 포함해 장기기억에 있는 정보를 사용하는 것인데, 모국어의 경우에는 상대방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답을 한다. 이는 장기기억의 인출이 그만큼 빨리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는 강력한 증거다. 물론 노력을 해서 가까스로 장기기억에서 인출해내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다. 그렇다면 왜 어젯밤에 졸음을 참아 가며 공부한 것이 시험을 볼 때에는 생각이 잘 안 나는 것일까? 부호화가 잘 안 되어서, 바꿔 말하면 조직화나 정교화가 덜되었기 때문일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장기기억에서 인출을 못하는 것은 정보가 장기기억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기보다는 장기기억에서 그 정보를 찾아내지 못한것, 즉 정보에 접속이 안 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인 생각이다. 접속이 안되는 이유로는 다른 정보가 인출을 간섭했을 가능성과 인출단서가 부적절했을 가능성을 들 수 있다.
장기기억에는 많은 정보가 있다 보니, 내가 인출해야 하는 정보와 비슷한 정보들이 정확한 정보의 인출을 방해할 수 있다. 내가 찾는 정보보다 미리 학습한 정보가 방해를 하는 경우 순간섭(proactive interference)이 일어났다고 하고, 내가 찾고자 하는 정보보다 나중에 학습한 정보가 방해를 하는 경우 역행간섭(retroactive interference)이 일어났다고 한다. 장기기억에 있는 정보를 인출하지 못하는 두 번째 주된 이유는 인출단서가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털빙과 펄스톤(Tulving & Pearlstone, 1966)은 대학생들에게 네 가지 범주로 조직화될 수 있는 명사들을 학습하게 하였는데, 그중 일부에게는 학습단계에서 범주명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학습이 끝난 다음 명사들을 회상하게 하였더니 상당수의 명사를 회상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곧이어 범주명을 알려 주고 나서 다시 회상하게 하였더니 처음에는 회상하지 못했던 명사들 중 아주 많은 수의 명사를 회상하였다. 이는 장기기억에 있는 정보를 회상하지 못하는 것은 인출단서가 없거나 부적절해서 접속에 실패한 때문이지 정보가 없어진 때문이 아님을 보여 준다.
장기기억을 인출하는 데 인출단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현상으로 상태의존적 기억을 들 수 있다. 상태의존적 기억은 학습할 때의 상태와 인출할 때의 상태가 일치할 경우 훨씬 더 잘 기억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고든과 배들리(Godden & Baddeley, 1975)는 잠수부에게 단어들을 학습시킨 다음 단어들을 회상하게 하였는데, 학습할 때의 물리적 맥락과 인출할 때의 물리적 맥락이 같을 때(예컨대, 수중에서 학습하고 수중에서 회상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을 때(예컨대, 수중에서 학습하고 백사장에서 회상하는 경우)보다 단어를 더 많이 회상하였다. 상태의존적 학습과 같은 현상들을 털빙과 톰슨(Tulving & Thompson, 1973)은 부호화특수성이론을 내세워 설명하였다. 즉, 학습과 인출의 부호가 같으면 인출이 잘 되며, 인출확률은 학습맥락과 인출맥락의 일치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3) 도식과 인출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우리가 인출하는 것은 기억에 있는 것만을 수동적으로 읽어 낸 것일까? 놀랍게도 우리가 인출해내는 것은 기억에 있는 것만을 수동적으로 읽어 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서 그럴싸하게 재구성해낸 것일 수도 있다. 영국의 심리학자 바틀릿 (Bartlett, 1932)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회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현상을 여러 연구를 통해 보고하였다. 그는 영국 대학생들에게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게 하기도 하고, 영국 대학생에게 친숙하지 않은 에스키모 인디언의 설화를 들려주고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서 회상하게 하였는데, [그림 5-기에서 보듯이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게 한 경우 점차 원본과는 다르게 그림이 변질되어 갔다. 친숙하지 않은 설화를 회상하게 한 경우에도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탈락되어 갔으며, 이야기의 내용이 영국 대학생에게 친숙한 내용으로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갔다. 그는 이런 결과들을 토대로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경험한 내용들을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저장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통합된 전체 기억 표상을 도식(schema)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할 때 자기의 도식에 맞게 그 내용을 왜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러멀하트(Rumelhart, 1980), 솅크와 에이블슨(Schank & Abelson, 1975) 등은 관련된 정보들이 조직화된 거대 단위의 기억을 도식 혹은 사건도식(스크립트)이라 불렀으며, 도식으로 총칭되는 이런 거대 기억들이 지각, 기억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예를 들어, '철수가 치과에 갔었다.' 는 말만을 듣고도 우리는 철수가 진료가 끝난 다음 치료비를 내고 나왔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이 기억해내는 것은 실제 기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싸하게 구성한것일 수 있다는 것을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프튜스(Loftus)는 한 실험에서 차가 달리는 비디오를 대학생들에게 보여 주었다(Loftus & Palmer, 1974). 실제로 비디오에서는 차가 도로표지판을 건드리지않았지만, 어떤 학생들에게는 차가 표지판을 건드렸을 때(hit)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었는지 속도를 추정하게 하였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차가 표지판을 들이박았을 때(smashed into)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었는지 속도를 추정하게 하였다. 전자에서 학생들이 답한 평균시속은 34 마일이었는데 반해, 후자에서의 평균시속은41마일이었다. 더 놀라운 결과는 일주일 후에 그 학생들에게 새 질문을 했을 때 였다. 전조등이 깨진 장면은 비디오에 없었는데도, 학생들에게 그 장면에서 전조등이 깨진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일주일 전에 들이박았을 때 속도를 추정하라는 질문을 받았던 학생들이 (32%) 건드렸을 때 속도를 추정하라는 질문을 받았던 학생들보다(14%) 훨씬 더 많이 깨진 전조등을 보았다고 답하였다. 이 실험 결과는 유도질문과 같은 것들이 기억인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서, 증인의 증언만으로는 법적인 판단의 근거가 될 수없다는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장기기억에서는 정보의 조직화와 정교화가 부호화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출은 인출단서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 장기기억에는 반복해서 연합되거나 관련 있는 정보들이 체제화된 도식이라는 기억도 있는데, 도식은 부호화뿐만 아니라 인출에서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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